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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삼국 시대를 이루고 있는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교육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기원전 1세기부터 7세기까지, 고구려와 백제, 신라 삼국이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서 국가를 이뤘던 삼국 시대의 교육은 한국 교육사에서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삼국이 서로 경쟁하는 체제에서 시대적인 상황에 대응하는 형태로 나타났건 '문무의 균형'을 이루었고,
'심신의 조화'를 이루었으며, '지와 덕과 체의 교육'으로 이루어졌던 교육의 형태는 중국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삼국 시대에 이루어졌던 교육에 대하여 자료가 적기 때문에 정확한 수준을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당시의 사회상을 통하여 추정해 볼 수 있으며,
종교가 당대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아 교육 활동에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 볼 수가 있습니다.
삼국 시대의 교육 특징
삼국 시대의 교육 특징은 부족국가들을 합쳐서 삼국 시대를 이루는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각각의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고대국가 체제를 이루기 위해 역사서를 편찬하고 고대국가의 양상을 띠도록 율령을 반포하였고, 이러한 것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고구려와 백제, 신라는 학교나 학교와 비슷한 교육 조직은 운영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삼국 시대를 열고 있는 고구려, 백제, 신라는 세력 균형을 이루고 있어서 전쟁이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위기가운데 있었고, 삼국의 교육은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을 그대로 나타냈습니다.
문무의 균형을 이루는 교육과 수련활동이 이러한 특징으로 나타납니다.
삼국 시대의 이러한 교육 활동은 대한민국의 역사상 가자 독특하고 독창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삼국 시대 이전에 각 부족이 독자적인 교육이 진행되었고, 세 나라가 각각 비슷하면서도 다른 측면이 있었기에 교육에 있어서 각각의 특수성과 보편성을 볼 수 있습니다.
삼국 시대의 교육: 고구려
삼국 시대 중 고구려의 교육은 주로 태학과 경당에서 이루어졌습니다.
- 태학
태학은 372년 소수림왕 2년에 설립되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학교라는 교육사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문헌상으로는 성립 외에 다른 것이 없으며, 중국의 동진과 고구려가 긴밀한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으로 유추해 볼 때 태학이 중국 도진의 학제를 참고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입니다.
태학에 입학하는 대상은 귀족층이었을 것으로 보이고, 관료들을 양성하는 기관으로서 귀족들의 관료로 진출하기 위한 과정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당나라에서 편찬한 「구당서」에 의하면 고구려는 5 경과 같은 유교경전과 역사서, 한자사전, 문학서적이 있었고, 이러한 서적은 태학에서 관료들을 양성할 때에 사용하던 교재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습니다.
중국 고구려 관련 사료에는 '태학박사'라는 제목과 이름이 등장하는 것으로 볼 때 스승을 부를 때에 '박사'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구려에는 '태학'과 함께 '국자학'도 있었습니다.
- 경당
고구려에 있던 교육기관은 '태학'과 '국자학'과 더불어 '경당'이 있었습니다.
지방에 설립된 '경당'은 지방 곳곳에 세워졌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주로 귀족층이 입학했던 태학과 달리 경당은 주로 청소년층이 입학했던 것으로 보이고, 가난한 사람들도 경당에 재학했다는 기록이 있을 것으로 보아 평민들도 입학대상으로 한 교육기관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방에 있는 귀족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기관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경당은 폭넓게 지방의 귀족과 평민이 모두 입학할 수 있었던 교육기관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입니다.
경당의 교육형태는 문무를 병행한 교육이었을 것입니다. 고구려가 처해 있는 시대적인 상황은 백제와 신라뿐 아니라 중국과도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시를 대비해야 하는 했으므로 학문은 물론 전쟁을 대비한 군사훈련 역시 준비하는 교육을 진행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국가의 전시를 대비하는 교육은 국가에서 주관했을 때 가능하므로 경당은 국가에서 제정한 학문인 '관학'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경당의 특징과 유사한 기관은 신라의 화랑도가 있습니다.
삼국 시대의 교육: 백제
백제시대의 교육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중국의 제한적인 역사자료를 참조하여 백제시대의 교육에 대해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백제에 교육기관이 있었는지에 대한 단서는 없으나 '박사'라는 호칭이 자주 언급되었다는 기록으로 볼 때 교육기관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박사'라는 호칭은 중국에서 유교경전의 연구와 교육을 담당했던 학관의 일종입니다.
백제의 관서에 교육을 담당하는 사도부가 있었고, 백제 무왕 때 6좌평 중의 하나로서 교육 장관의 직무를 담당하는 내법좌평이 있는 것으로 백제에 교육기관이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백제 시대에 사용했던 '박사'라는 칭호는 각종 전문가들에게 주는 칭호였습니다.그중에『역경』『시경』『서경』『예기』『춘추』 등 다섯 경서에 능통한 사람을 오경박사라 하였고, 5경을 주요 교육과정으로 삼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일본에 초대되어 일본으로 간 '아직기는 경전을 해독할 수 있는 자'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백제에서 5경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졌음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왕인이 일본으로 갔을 때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백제는 교육하는 것이 5경뿐만 아니라 천자문과 사상문, 사서 등을 교육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중국 당나라 때 지어진「북주서」에 따르면, '백제인들은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겼으며, 아울러 고서나 사서 읽기를 좋아하였다. 그 가운데 뛰어난 자는 작문과 시작에 능통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백제는 서적 중심의 교육과 함께 무술교육도 중요시하는 문무가 겸비되도록 교육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밖에 전업박사라는 제도를 통해 잡학교육도 실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백제는 문무는 물론 잡학적인 교육도 실시하는 상당히 뛰어난 교육제도가 마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삼국 시대의 교육: 신라
신라 고유의 교육제도에는 화랑도가 있습니다.
신라 중대의 진골 역사학자인 김대문이 쓴 책 「화랑세기」를 통해 화랑도가 신라의 교육제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신라가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서 학교 설립이 늦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일찍부터 화랑도가 있었기 때문에 학교 교육이 늦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신라가 인재들을 양성하는 방법은 중국식의 학교제도와는 다른 형태였습니다. 화랑도 이전에 '원화제도'라는 집단이 있었는데, 이는 진흥왕 37년에 삼국 간에 항쟁이 커지게 되면서 청소년 단체를 개편해 원화를 만들었습니다.
원화의 장에는 여성을 임명하여 효도와 충성과 신의를 가르치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후에 원화의 장이었던 '남모'와 '준정'이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게 되는 사건으로 남모가 살해되고 남은 준정은 사형에 처하게 되었고, 원화제도는 사라지게 됩니다.
이후에 마을마다 있던 청소년 공동체 집단에서 자생적으로 화랑도가 생겼습니다. 화랑도는 특정한 사람이 본이 되어 그를 중심으로 하는 수양단체였으며 초기에는 조직적인 모습이 없었으나 이후에 국가적인 차원에서 화랑도를 조직화하였습니다.
화랑도 조직에는 왕이 특별히 임명한 자를 국선화랑을 두고 그 밑에 화랑도가 있었고, 각 화랑도에는 한 명이나 또는 여러 명의 화랑이 수백, 수천 명의 인원을 낭도를 통솔하였습니다.
화랑이 되기 위해서는 수려한 외모를 갖추고, 올바른 행실을 하며, 귀족 신분으로 14세에서 18세 사이의 남자였습니다. 화랑은 낭도를 통솔해야 하고 경제적인 부담도 스스로 져야 했으므로 귀족 신분을 뽑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화랑도에서 중요시했던 교육은 '도의교육'으로 '세속오계'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세속오계'는 유교의 영향을 받은 사군이충, 사친이효, 교우이신과 불교의 영향을 받은 임전무퇴와 살생유택으로 화랑도는 도의교육뿐 아니라 상호 간의 유대의식 강화, 국토순례를 통한 심신수양들이 교육의 주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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