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 8. 23.

    by. 위드_길

    목차

      조선 시대의 최고의 교육 기관은 성균관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어느 시대든지 그 나라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교육 기관이 있었는데, 고구려 시대에는 태학, 신라 시대에는 국학, 고려 시대에는 국자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려의 국자감은 고려 말기 때에 성균관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는데 조선 시대에 성균관 이름은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조선 시대의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자 합니다.

       

       

      성균관

       

       

      조선 시대 성균관에서 하는 일

      조선 시대 성균관에서 하는 일을 알아보기 전에, 조선은 태조 이성계에 의해 건립이 되었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한양을 도읍지로 정하고, 고려의 교육제도를 이어받아 한양에 성균관을 새로 짓게 했습니다. 성균관은 조선 시대의 독립된 교육 기관으로 오늘날로 말하면 국립대학교에 해당하는 조선 최고의 교육 기관입니다.

       

      조선 시대에는 나라를 다스리기 위하여 '유학'을 기본 학문으로 정했기 때문에, 성균관에서는 학생들에게 유학을 가르치는 일을 했으며, 또한 '유학'학문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공자를 비롯한 유학학자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일을 했습니다. 실제로 성균관의 대성전에서는 유학학자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성균관에는 똑똑하고 유능한 관리들을 양성하기 위해 전국에서 인재를 모으도록 했으며, 중요한 것은 성균관 학생들을 통해 나라의 미래가 좌우한다고 여겼습니다. 세조 관제 개혁 때는 정 2품 중에 학식이 뛰어난 관리들을 성균관의 교관으로 뽑았고, 성균관의 학생이 되기 위해서 소과인 '생원시'와 '진사시'라는 시험에 합격을 해야 하므로 대체로 양반 가문의 자제들이 입학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여기서 생원시란 경전을 읽고 해석하는 시험이고 진사시는 글을 짓는 능력을 보는 시험이며, 시험에 통과되면 '생원'과 '진사'라고 불렸는데, 매년 100명만 뽑았기 때문에 합격이 어려웠다고 합니다.

       

      조선 시대 성균관에 있는 것

      조선 시대 성균관의 건물에 있는 것을 살펴보면, 대성전 구역과 명륜당 구역으로 크게 나뉘어 볼 수 있습니다. 대성전은 동무, 서무 등 제사를 위한 공간으로, 조선의 기본 학문인 유학의 학자인 공자를 비롯하여 유학 학자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입니다. 대성전에는 공자의 위패가 있고, '석전대제'라 하여 음력 2월과 8월에 제사를 지냈으며 이때에 쓰이는 음악을 '문묘제례악'이라고 합니다. 석전대제에는 임금도 참석할 만큼 중요하게 여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명륜당 구역은 교육을 위하여 세워진 곳으로 존경각, 동재, 서재 등이 있습니다. 존경각은 명륜당 뒤편에 마련이 되어 있는 오늘날의 도서관이며, 동재와 서재는 서로 마주 보고 있는데 오늘날의 기숙사로 각각 학생들이 먹고 자는 등 생활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조선 시대 성균관 유생

      조선 시대 성균관에 다니는 학생을 '유생'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균관 유생들은 성균관에 다니는 동안 나라에서 키우는 인재들로 성균관에 합격을 하면 무료로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성균관 유생들이 주로 했던 일은 유교 경전을 익히고 과거 시험 준비를 통해 합격을 하는 것입니다. 조선 시대 관리가 되기 위해서는 '대과'라는 과거 시험에 합격해야 했으며, 과거 시험은 굉장히 어려웠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조선 시대 성균관 유생들의 생활

      조선 시대 성균관 유생들의 생활은, 북소리에 의해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북소리 한 번에 기상을 하고, 북소리 두 번 울리면 새벽 공부를 하고, 북소리 세 번 울리면 아침식사를 했다고 합니다. 성균관 유생들에게 규칙 같은 것이 있었는데, 아침과 저녁에 식당에 비치되어 있는 출석부에 자신의 이름을 적으면 1점의 점수를 받았고, 이 점수가 300점이 넘을 경우에 대과를 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으며, 300점을 넘으면 성균관을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즉 학년제가 아니라 적어도 300일을 공부해야 자격이 주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균관 유생들의 공부하는 방법은 논어와 맹자, 시경 등 유교 경전 9과목을 공부했는데, 기본적으로 3년을 공부해야 마칠 수 있는 분량이었습니다. 시험을 통해 통(합격)-약-조-불(불합격)의 점수를 받았습니다. 공부하는 방식은 유생이 스승에게 질문을 하면 스승이 답을 해주는 것으로 공부가 진행되었고, 배운 것을 복습한 뒤에 스승에게 점검을 받아서 통과하는 형태로 공부가 진행되었습니다.

      성균관 유생들은 나랏일에도 관심이 많았고, 실제로 상소를 통해 자신들의 생각을 임금에게 알리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숙종에게는 중전 인현왕후와 후궁들 중에 숙종의 사랑을 받는 장희빈이 있었습니다. 후궁 장희빈이 아들을 낳고 인현왕후를 몰아내고 자신이 중전에 앉으려는 생각에 모함을 하기 시작했고, 숙종은 인현왕후를 내치기로 결정했는데, 이때에 성균관 유생들은 식사와 학업을 거부하고 성균관 마당에서 숙종이 있는 곳을 향해 왕의 뜻을 거두어달라는 단체행동을 했다고 합니다.

       

      조선 시대 성균관과 향교

      조선 시대에는 성균관과 더불어 향교가 있었습니다. 성균관이 서울에 있었던 국립대학의 성격이라면, 향교는 지방에 있는 국립 중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교육기관입니다. 향교에 다니는 학생을 교생이라 불렀는데, 교생은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면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향교에서 배우는 학문은 사서오경과 소학으로, 사서오경에는 기본 유학 경전인 논어, 맹자, 중용, 대학 등과 시경, 서경, 주역 등 유학책을 배웠고, 소학은 예의범절과 효자의 도리, 충신의 도리 등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의 기본 학문인 유학을 알리기 위해 향교에서 공부를 할 경우에는 군역을 면제해 주기도 했습니다.

       

      성균관은 조선 시대 후기에 들어오면서 기능이 점점 약화되었습니다. 과거 시험제도에 문제점이 발생하고, 지방에 서원이 생겨나면서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의 수가 줄어들었습니다. 그러나 성균관 유생들을 위해 과거 시험에 유리한 특별 시험이 시행되기도 하면서 조선시대의 학문인 유학을 권장하기 위해 성균관의 기능을 계속 유지하도록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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